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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

요한 세바스찬 바흐_독일 작곡가

1723.3.26 종교 음악 불후의 명작<요한 수난곡>이 성 금요일에 처음 연주되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악기를 익히고 궁정악단에서 연주와 지휘를 맡았던 요한 세바스찬 바흐. 그는 교회음악가로 활동하면서 바로크음악을 대표하는 수많은 곡을 남겨서 '음악의 아버지'라 불렸다.

 

1723년 3월 26일은 성 금요일로 바흐가 라이프치히 시의 위촉을 받아 작곡한 총 40곡으로 구성된 <요한 수난곡>이 첫 연주된 날이다. <요한 수난곡>은 <마태 수난곡>과 더불어 바흐 종교 음악의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족보 있는 음악가 집안의 유전자를 물려받다

클래식 애호가들의 방에 가보면 음반들이 바흐를 기준으로 정리되어 있다. 보통 알파벳 순으로 정리하기 마련인데, 바흐보다 먼저 정리해야 할 음반들도 보통은 그의 뒤에 둔다. 바흐는 음반정리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바흐에 대한 찬사 중에 베토벤의 말이 인상적이다. 바흐의 이름이 '시냇물'이라는 뜻에 빗대어 베토벤은 “그는 시냇물이 아니라 크고 광활한 바다라고 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베토벤은 바흐를 ‘화성(和聲)의 아버지’라고 대선배로 모셨다. 바흐는 서양음악의 출발점처럼 보이지만, 이전에도 우리에겐 캐논으로 유명한 바흐 시대의 스타 텔레만, 파헬벨이나 헨델이 있었고, 중세시대, 르네상스 시대의 빛나는 음악가들이 있었다. 바흐는 이들 사이에서 이름 그대로 시냇물처럼 조용히 흘렀다.

 

서양음악의 바로크 시대는 1750년 바흐의 죽음으로 마감될 정도로 바흐는 서양음악사의 절대적인 존재이다. 이 절대성은 서양음악과 기독교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평생 교회를 벗어나지 않고 신탁을 받은 사제처럼 음악에 몰두했다. 그래서 "그의 소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의 명성에 오른 것"이라고 바흐의 전기를 쓴 슈바이처 박사는 말했다.

 

바흐 가족의 아침 기도 풍경

바흐 가족의 아침 기도 풍경

 

 

바흐는 음악에서만 바다처럼 풍요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두 부인에게서 스무 명의 자식을 둔 아버지이기도 했다. 더불어 바흐 집안은 약 200여 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음악 가족이었다. 이 가계의 6세대를 통틀어 예술가가 아닌 사람은 불과 두 세 명에 지나지 않았다. 바흐의 선조인 제과업자이면서 치터(Zither:현악기의 일종)를 연주한 파이트 바흐 이후, 중부 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 바흐 가문은 뿌리를 내렸다. 가족들은 모두 루터 정통파의 경건한 신자였다. 파이트 바흐의 장남이자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증조부인 요하네스는 바이마르 거리 악사로서 그 이름은 이웃 고장에까지 전해 졌다.

 

그의 장남인 요한은 바흐 가문 최초의 작곡가로서 알려져 있고, 3곡의 작품이 현존하고 있다. 요한의 동생 크리스토프가 바흐의 조부로서, 악사로 활약했으며, 동생인 하인리히의 칸타타는 한 곡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하인리히의 장남 요한 크리스토프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서, 작곡가로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동생 미하엘도 음악가였으며, 그의 막내딸 마리아 바르바라는 훗날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첫 아내가 된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조부 크리스토프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 게오르크 크리스토프는 바흐 집안에서 처음으로 칸토르(교회 합창단장)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 동생 요한 크리스토프와 요한 암브로지우스는 일란성 쌍생아로서 모두 악사가 되었다. 이 암브로지우스의 막내아들이 요한 세바스찬 바흐(이후 바흐로 표기)이다. 마치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탄생 계보를 설명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만큼 바흐는 족보 있는 음악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불우했지만 음악적인 축복을 듬뿍 받은 어린시절

바흐가 태어난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크 교회의 옛 문서에 1685년 3월23일에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된 것을 근거로, 바흐의 탄생일은 3월 21일로 추측하고 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풍성한 음악적 분위기 속에서 바흐는 자란다. 일곱 살 무렵에 성 게오르크 교회의 부속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고, 이때부터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성가 대원으로서 일했다. 1695년에 바흐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그 이전에 돌아가셨다. 양친을 잃은 바흐는 맏형인 요한 크리스토프를 따라 오르도르프로 이주한다. 이 시절의 바흐는 당대 대가들의 작품 사보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형의 악보를 몰래 빼내 필사하면서 음악 공부를 하였다.

 

오르도르프의 학교에서 라틴어와 루터 정통파 신학을 배운다. 형의 가족이 늘어나자 바흐는 1700년 봄에 북독일의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자립한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그는 북독일 학파의 다채로운 음악을 접했고, 교회 오르간 연주의 대가 게오르크 뵘도 만나게 된다. 또한 함부르크에서 북독일 오르간악파의 노대가 라인켄의 음악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웃 고장인 쩰레의 궁정악단 연주를 듣고 프랑스악파의 양식을 알게 되었다. 바흐는 부모를 잃어 유년시절을 유복하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음악의 축복은 듬뿍 받았다. 이러한 성장 배경이 그의 음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찍이 궁정악사로 취직,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교회로부터 비난을 사기도

이후, 바흐의 음악인생은 그가 살았던 장소에 따라 대별된다. 즉 아르슈타트과 뮐하우젠 시대, 바이마르 시대, 괴텐 시대,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만년의 걸작들을 만들었던 라이프치히 시대이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바흐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음악가로서 취직을 해야만 했다. 처음엔 궁정악사로서 일하다가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아른슈타트의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취임한다. 바흐 가문과 좋은 관계로 지냈던 이 지역의 당국자들도 바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좋은 대우를 해 주었다. 이 직책은 오르간 연주뿐 아니라, 성가대를 훈련시켜야 했는데, 18세인 바흐는 젊은 대원들과 길거리에서 주먹으로 치고 받기도 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근엄하고 종교적인 이미지의 바흐도 혈기방장한 젊은 시절이 있었다.

 

또한 젊은 바흐는 휴가 기간을 지키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다. 지역의 성직회의에서는 그의 무책임과 성가대의 훈련을 게을리 했다는 점도 곁들여 바흐를 비난했고, 결국 성직회의와 충돌한 바흐는 1707년 6월에 중부독일의 소도시 뮐하우젠 성 블라지우스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직장을 옮긴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육촌 누이동생인 바르바라와 결혼했다. 이들의 일곱 자녀 가운데에서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과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은 특히 뛰어난 음악가로 성장했다. 뮐하우젠에서의 바흐는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도다> 를 작곡했다. 북독일악파의 양식에 의한 이 작품은 바흐의 생전에 인쇄, 출판된 단 하나의 교회 칸타타이다. 당시의 뮐하우젠은 다분히 교리주의에 빠져있던 루터 정통파와 개인의 종교 감정을 소중히 여기는 경건주의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바흐 집안은 대대로 루터 정통파였지만, 바흐는 경건파로 마음이 끌려 그 영향은 그의 작품에도 잘 반영되어 나타난다.

 

 

바이마르로 옮겨 본격적인 '오르간 곡 시대'를 열다

1708년 7월에 바흐는 바이마르에 새로운 직장을 얻었다. 이곳에서 오르간 연주자로도 이름을 날렸고, 작곡한 곡들은 점점 더 원숙해져 갔다. 교회의 오르간은 바흐가 원하는 대로 개조되었고, 이 악기에서 그의 오르간 곡들이 다소 탄생되었다. 그래서 바흐의 바이마르 시대를 그의 ‘오르간 곡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서 바흐는 비발디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협주곡을 알게 되었다. 바이마르의 궁정은 이탈리아에 문호를 열어서, 궁정악단에서는 이탈리아의 협주곡이 자주 연주되고 있었다. 독일 음악의 울타리에서 자란 바흐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여행을 별로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바흐이지만, 바이마르 시절에는 카셀,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외에도 1713년에는 헨델의 탄생지로 유명한 할레까지 돌아다닌다. 바흐의 매력에 빠진 바이마르의 영주는 그의 봉급을 올려주었고, 1714년 3월에 그를 궁정악단의 콘서트 마스터로 임명했다. 이로써 매월 1곡의 칸타타를 작곡하여 연주하는 일이 바흐의 새로운 직무가 되었으며, 1714년 이후 바흐의 활동은 칸타타에만 집중된다.


바흐 친필 악보

바흐 친필 악보

 

바이마르에서 바흐는 텔레만과 친교를 맺었다. 바흐에게 모인 제자도 많았지만, 영주와 그의 조카 사이에 권력다툼이 일어나 양쪽에 다 친했던 바흐는 그 사이에 끼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영주가 허락을 하지 않았지만 결국 바흐는 바이마르를 떠났다. 이 시기에 뛰어난 종교시인 노이 마스터와 프랑크의 가사에 의한 <자, 오라 이교도의 구세주여>, <하늘은 웃고 땅은 환호 하도다>, <오라, 그대 달콤한 죽음이여 >등의 명작이 태어났다.

 

 

두 번째 아내를 맞아 열 세 명의 자녀를 낳고 가정과 음악 모두 충만한 삶을 보내다

바흐는 쾨텐 시대(1717~1723)와 라이프치히 시대(1723~1750)에 왕성한 활동을 했다. 바흐와 더불어 헨델은 항상 같이 거론되는 바로크 시대의 거장들이다. 바흐는 일찍부터 헨델의 작품을 알고 그를 높이 평가했는데, 헨델이 런던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1719년 10월에 헨델의 고향인 할레에 갔으나 헨델이 떠난 뒤여서 결국 이 두 거장은 평생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헨델은 바흐와 더불어 서양 음악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필자가 바흐와 헨델에 대한 이런 음악사적인 은유를 말해주자, 어떤 이가 두 사람은 언제 결혼했냐고 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1720년에는 13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바르바라가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지독한 마음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년 후 소프라노 막달레나를 아내로 맞이한다. 두 사람 사이에서 13명의 자녀가 태어나고,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은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바흐는 고맙고 사랑스러운 젊은 아내의 애정에 보답하기 위하여 2권으로 엮은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을 쓴다. 쾨텐에서 바흐는 많은 제자들을 길렀다. 훗날의 편지에서 '쾨텐에서 일생을 마칠 작정이었다.'고 술회할 정도로 음악가로서 작곡도 많이 하고, 생활이 충만했지만, 바흐는 이 고장을 떠나 라이프치히의 교회 음악가가 된다.

 

 

라이프치히 시절 7년 동안 140곡 이상의 교회 음악 작곡

바흐의 라이프치히 생활은 시와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로 힘겨웠다. 1722년 6월에 성 토마스 교회 칸토르가 별세를 해서 그 후임으로 선택되었다. 5월 중순에 취임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어 바흐는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가 되었고 사망하기까지 27년 동안 그 지위에 있었다. 칸토르는 교회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할 책임자이기도 하였다. 성 토마스와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일요일마다 교회 칸타타가 연주되었고, 성 금요일에는 대규모의 수난곡이 연주되었다. 바흐는 1723~1729년 사이에 140곡 이상의 교회 칸타타를 비롯하여 <마태 수난곡>, <마니피카트> 등을 작곡하였다.

 

1750년 7월 죽음을 앞두고 그려진 초상화

1750년 7월 죽음을 앞두고 그려진 초상화


18세기 중엽은 음악분야에서도 크게 양식이 바뀌기 시작한 때였다. 인간의 이성과 자연감정을 추구한 계몽사상은 바흐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복잡한 대위법의 음악으로부터 단순 명쾌한 곡조를 선호했고, 교회음악도 보편적인 양식에서 주관적인 감정표현을 구하는 <다감(多感)양식>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1747년에 바흐는 포츠담의 유명한 계몽군주의 궁정을 방문한다. 왕은 바흐를 환영하고, 바흐도 왕이 제시한 주제로 즉흥연주를 들려주었다. 이 연주가 <음악의 헌정>으로 탄생했다. 1749년 5월 뇌일혈 발작과 함께 그의 시력은 급속하게 감퇴되어 그 뒤로 직접 곡을 쓰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작곡 중이던 대작 <푸가의 기법>이 중단되고 미완성인 채로 남겨진다.

 

1750년 3월 말부터 4월에 걸쳐 두 차례의 눈 수술을 받았으나 성공하지 못해 끝내 바흐는 시력을 잃고 말았다. 7월18일 무렵에 한때 시력을 회복하였으나 다시 뇌일혈 발작을 일으켜 10일 후인 1750년 7월 28일 오후 8시45분에 세상을 떠나, 성 요한 교회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소박한 성품으로 생전에 자서전을 남기지 않았지만 사후에 크게 평가되다

바흐와 같은 인물의 음악적인 업적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성을 지니고 있다. 평론가들은 그를 '작업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평생 교회에 머물면서 묵묵히 오선지에 신의 음성을 기록한 삶이었다. 식물들도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잘 자란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1등이 아니라 2등이었다. 자서전의 출판을 권하기도 했지만 거절한 것으로 보아 그의 성품은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경건하고 소박하게 자신의 일을 다 했다. 예술가의 삶은 그의 이름으로 사후에 평가된다는 전범을 바흐는 21세기의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평가는 기다리는 것이다. 진인사 대천명의 경구를 바흐에게서 나는 본다. 괴테는 <평균율곡집>을 듣고 이렇게 바흐를 노래했다.

 

"듣게 해주고 느끼게 해주오.
 소리가 마음에 속삭이는 것을
 생활의 차디찬 나날 속에서
 따스함과 빛을 내리시기를"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요한 세바스찬 바흐>(크리스토프 볼프 지음, 변혜련 옮김, 한양대학교출판부)를 우선 권한다. 이 책은 현재 바흐 연구의 최고권위자로 꼽히는 미국 하버드대 크리스토프 볼프 교수의 저서를 2007년 최신 발굴 정보까지 반영한 것이다. 바흐가 음악가로서 이룩한 업적과 동시대의 여러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음악의 상호연관성을 강조했다. 또한 <바흐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들>(음악세계)은 다양한 음악양식, 다각도의 학문적 연구를 통해 예술가들과 학자들이 본 바흐에 대한 에세이를 소개한다.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은 1802년 출판된 바흐의 첫 평전. 기록을 잘 남기지 않은 바흐의 음악을 위해 저자인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은 바흐의 두 아들을 통해 자료를 모았다. 바흐 전기의 1차 자료로서도 의미가 깊은 책이다. 좀 더 깊이 있는 바흐를 읽기 원하는 소수의 독자를 위해 음악세계사에서 나온 <바흐-작곡가별 명곡해설 라이브러리 4>를 권한다. 바흐의 악보와 더불어 전문적인 해설이 있는 책이다.

 

 

 

원재훈 / 시인, 소설가
글을 쓴 원재훈 1988년 시 '공룡시대'로 등단했으며 <낙타의 사랑>,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라하네>등의 시집과 <만남, 은어와 함께 보낸 하루>, <모닝커피>등의 소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나무들은 그리움의 간격으로 서 있다> 등의 산문집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집필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는 작가이다.

 

발행일  2009.03.26

 

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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